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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3.1절 특집기사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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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02-19 조회4,41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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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의 사상으로 희생해야 마음이 합쳐진다

용성 조사 법손 도문 대종사에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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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 민족대표 종교갈등 할 때 용성 조사가 통합시켜

중국보다 자비로운 한국에 의지하게끔 북한 대해야

 

도문 대종사는 “1차세계대전 직후 3·1운동이 일어난 지 90년이 된 지금 세계경제불황에 처해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이 비슷하다”면서 “이런 때일수록 무아의 사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촛불이 되어 대자대비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평안해 진다”고 말했다.

무아의 사상은 ‘나’라는 존재가 본래 있는 게 아니라 인연따라 만들어 진 것이어서 나도 내가 아니고 내 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석가모니의 핵심가르침이다.

도문 대종사는 민족대표 33인이 힘을 합칠 수 있었던 것은 용성조사가 무아의 사상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일제를 이겨낼 수 없으니 33천 도리천 하느님이 보우해야 한다며 민족대표를 33인으로 하자고 제창한 분이 용성조사였다. 불교 천도교 기독교 각 11명씩으로 대표를 내기로 합의가 됐는데, 며칠 안남기고 갑자기 기독교 장로회가 11명을 하겠다, 감리회도 11명을 달라고 했다. 장로회 감리회가 서로를 같은 기독교로 치지 않겠다며 자기 몫을 주장했다. 일이 어려워지자 44명이면 어떻고 55명이면 어떠냐며 숫자를 늘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용성조사가 한용운선생에게 33이라는 숫자가 중요하니 천도교에 15명을 주고 기독교에 모두 16명을 주고 불교계는 너하고 나하고 둘만 들어가자고 해서 33명이 된 것이다.”

송만공 진진응 박한영 송만암 등 기라성같은 불교계의 대표들이 서명하기로 묵계가 되어 있었으나 불교계가 민족대표의 몫을 주장하지 않고 희생함으로써 33인의 독립선언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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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교주 기독교 거부

천도교의 손병희 교주도 처음에는 기독교와 함께 독립선언을 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손병희 교주가 ‘우리는 원래 서학을 반대해서 동학으로 시작했다, 불교와는 손잡겠지만 기독교와는 손잡지 못하겠다’고 했다. 용성조사께서 ‘동쪽하늘이 따로 있고 서쪽하늘이 따로 있느냐. 본래 남북이 따로 없는데 동서가 어디에 있느냐’며 손 교주를 설득했다. 용성조사는 ‘나의 스승 혜월은 너의 할아버지 최제우의 친구다. 너의 할아버지 때문에 내 스승은 승적을 박탈당했고, 나는 스승의 승적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였다’며 과거 인연을 들어서 손 교주를 설득할 수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선언이 2000만 민족의 불길로 번진 배경에도 ‘무아사상’은 관철됐다. “내 은사인 동헌완규스님이 3월1일 거사일에 조사스님을 태화관에 모시고 갔다. 조사스님이 ‘경찰서에다 전화해서 독립만세 한다고 해라. 한용운이 독립만세 읽는 순간에 맞춰서 들이닥치게 찔러라.’ 한마디로 밀정노릇을 하라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이 멍청한 놈아. 전부 다 형무소에 들어가야 독립이 된다’고 하더란다. ‘선언서만 읽고 슬슬 피해갈려고 하니까 다 형무소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거라. 기생들이 애국자였는데 민족대표들 신발이랑 웃옷을 감추라니까 알아먹고 다 감췄단다. 한용운 선생이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외치는 순간에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 민족대표 33인이 다 잡혀갔다고 신문에 나고 난리나는 바람에 전국에 만세운동 불길이 일어난 거라.”

도문 대종사는 이 대목을 얘기하며 “은사스님께 23년동안 그 얘기를 들었다”며 “독립운동은 무아의 희생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문 대종사의 집안도 원래 전북에서 만석군 가문이었으나 증조부 임동수가 용성조사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부친 임철호가 옥고를 치르면서 가산을 모두 소진했다고 한다.

 

촛불시위 참 좋은거예요

도문 대종사는 나를 고집하여 나라의 운을 그르친 예로 색다른 경험도 들려줬다. 4·19 후 민주당 정권 때 그는 할아버지의 친구인 가인 김병로의 부탁으로 승려의 신분으로 정책비서실장을 맡은 적이 있다. 가인이 국회에 진출하면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는 건 기정사실인 상태였다. 신파인 장 면이 가인을 면담하고자 했는데 “쪽바리 장 면은 안돼!”라며 면담을 거절했다고 한다. 일본 게다짝을 신고 다녔다는 이유였다. “무아의 사상으로 돌아가라. 지금 이 세상에 쪽바리 찾아서 되겠느냐”고 말렸지만 “안 만나”하는 바람에 돌아갔다. 당권을 쥔 장 면이 지역구에 홍영기를 공천하고 가인을 배제해 버렸다.

도문대종사는 “그때 가인이 대통령 됐으면 감히 군인들이 들고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최고’라는 관념에 빠져 일어난 비극인 셈이다.

도문 대종사는 남북문제도 무아사상으로 큰 가닥을 추렸다. “통일신라가 이리떼 같은 후백제 견훤보다 고려의 인자한 태조에게 나라를 의탁했던 것처럼, 북한 지도자들의 마음이 중국보다 한국에 더 의지하는 마음이 들도록 우리 국민들이 대자대비한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 법륜스님이 지난해 북한 식량보내기를 위해 79일간의 단식을 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한 사실에 대해서도 “당장 쌀 한가마 보내는 것도 좋지만 우리 국민들이 대자대비한 마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촛불시위가 참 좋은 거예요. 자기를 태우면서 빛이 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 세상사람들이 다 촛불시위를 해야 합니다. 다 자신을 태우는 촛불이 되어야 합니다. 무아의 사상으로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입장에서 모든 사람을 수용한다는 자비의 정신으로 풀면 모든 어려움이 풀립니다.”

진병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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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바꾼 건 도문큰스님이었다”

정형근 국민건강관리공단 이사장

 

안기부의 공작정치로 ‘악명’을 떨쳤던 정형근 국민건강관리공단 이사장. 그는 2007년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한반도 평화비전’을 발표했다. 한반도종전선언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북한방송을 전면개방하는 내용을 담아 보수진영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명박정부 등장 후 지난해 5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이던 그는 “6·15 10·4선언의 정신을 존중하고 합의이행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문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대통령은 당시 남북기본합의서를 가장 중시한다며 이 두 선언의 존재를 무시하는 입장이었다.

정 의원의 변신에 대해 진보진영은 정략이라고 의심했고,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는 달걀세례를 퍼부으며 ‘배신자’라고 매도했다.

정 이사장은 2월27일 “나를 바꾼 건 도문스님”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민중과 민족을 위해 일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라고 말했다. 10여년전 지역구에서 열린 도문스님의 법회에 참석했을 때 신도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도문큰스님이 말없이 그를 품어주었다.

용성조사가 남긴 유훈 10조 열 번째가 “악한 이나 선한 이를 가리지 말고, 잘난 이나 못난 이를 가리지 말고 인연따라 신도를 삼아 찬양도 받으면서 비방도 함께 받아 모두 다 수용하는 상불경보살이 되라”는 것이다. 도문 스님이 일부의 비방이 있다고 하여 정 의원을 내칠 리가 만무했다.

“남과 북이 따로 있는가. 이념보다는 민족을 아우른 용성조사의 독립정신을 본받아 정 의원이 통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스님의 당부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정 이사장은 “남북간에 경제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는데 우리가 조금 더 양보하고 지원해서 북을 통일로 이끌어내야 한다. 대북정책을 바꾸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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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어머니라면 용성 조사는 아버지”

장개석 모택동과 함께 대한의사군 1만명 무장진격작전 추진

 

3·1운동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는 2명이다. 백용성 조사와 만해 한용운 선생. 토착화된 종교인 불교계가 정작 나라의 독립운동에는 소극적이었을까.

1962년 건국훈장이 서훈될 때 만해는 1등급인 대한민국장 용성조사는 한등급 아래인 대통령장이 수여됐다. 만해가 불교계를 대표했고 용성조사는 이를 지원한 역할에 그쳤기 때문에 서훈에 차이가 난 것일까.

불교계는 천도교와 기독교의 반목이 일어나자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무아의 사상으로 3·1운동 33인 민족대표를 결속시켰다. 바로 용성조사가 그 막후 인물이었다. 용성조사가 없었다면 민족대표 33인의 거사가 종교간 갈등으로 무산될 수도 있었음을 도문대종사는 증언했다.(윗 기사 참조)

만해선생의 항일정신은 용성조사로 인해 더욱 다져졌다. 도문대종사는 “만해선생은 초기에 글을 쓸 때 ‘대정’이라는 일본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조사님께서 그러면 안된다고 바로잡아 주는 등 정신적 스승으로서 만해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용성조사 연보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기세를 더욱 높혔다. 나약한 지식인 종교인들이 소극적 저항에 머물렀을 때 용성조사는 동북아 국제정세를 운용하는 높은 안목을 발휘했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한 김 구 주석이 20여일만인 12월12일 대각사를 찾아 용성조사전에 예배하면서 숨겨졌던 조사의 활동이 공개됐다. 김 구 선생은 “용성큰스님께서 계속 보내주신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주시어 만대 위국충절의 사표가 되도록 하였다”면서 눈물을 쏟았다. 이때 대각사 대들보가 갑자기 부러져 김 구 선생의 불운을 예고했다는 기록이 연보에 적혀 있다.

용성조사는 1930년 서울 대각사에서 윤 의사에게 3귀의 5계를 주어 불자로 삼은 후 만주 용정의 대각사를 거쳐 상해의 김구 선생에게 보냈던 것이다.

윤 의사 의거 이후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용성조사가 직접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도문대종사의 아버지 임철호 선생이 통역하는 가운데 장개석 장학량 모택동을 차례로 만난다. “대한 의사 윤봉길을 아시지요. 내가 그를 보낸 사람이오.” 장개석은 이 한마디에 눈빛을 빛내며 “다음 얘기하시오”라고 응대했다. 대한의사군 1만명을 만들테니 국부군 십만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을 만나서도 “대한의사군 한명이 얼마나 무서운가”라며 공산군 10만을 약속받았다. 이리하여 대한의사군 1만명을 공산군에 보내 합동훈련을 한 후 다시 국부군 10만과 합쳐 일본군 섬멸작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합의했다.

귀국하여 대한의사군을 모집하던 중 일본밀정이 용성조사에게 접근했다. 안 모라는 이 인물로 인해 북간도에 마련했던 독립군의 거점인 화과원이 완전 파괴됨으로써 21만명 조·중 무장진격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1940년 용성조사는 “사자뱃속에서 충이 생겨 사자가 쓰러지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곧 열반에 들 것을 예고했다.

대각사에서 1940년에 열반에 든 용성조사는 눈을 감은 후 더욱 거센 시련을 겪어야 했다. 90%가 넘는 승려가 친일행위를 했기 때문에 해방이 되었다고 용성조사의 행적을 제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그를 좌익으로 모는 수난이 일었다.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만주로 넘어가 무장투쟁을 하면서 김일성 부대와 조우한 인연이 있다. 이 것이 6·25 전란 중에 북한군이 서울 조계사와 대각사가 불태우지 않은 배경이 됐다.

도문 대종사는 “조사님과 제자들의 독립운동 행적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남북통일이 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면서 “용성문도인 성철 종정조차도 이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안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세간에서 용성조사가 만해선생보다 쳐져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문 대종사는 “불교계의 독립운동에서 만해선생이 어머니라면 용성조사는 아버지와 같았다”면서 “이제 바로잡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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