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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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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02-24 조회6,65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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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말이란 화두(話頭)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를 보는 선(禪)’인 것이다. 그래서 간화선에서는 보통 화두(話頭)를 든다고 표현한다. 화두를 마음의 중심에 들어 올려 또렷하게 보는 것, 온 몸과 마음으로 그 본질과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맑고 고요한 본래 모습을 보는 것이 간화선이다. ‘화두를 참구(參究)한다, 화두 공부를 한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머리로만 하는공부가 아니라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익히는 것이 진정한 화두 공부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에서 화두를 든다는 것은 온몸과 마음에 화두 하나만이 뚜렷이 걸려있다는 의미이다.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그 속으로 사무치게 들어가는 것이다. 한 겨울에 태종대 앞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두터운 겨울옷을 활활 벗어던지고 바닷물로 뛰어 들어 가는 것과 같다.

에일 듯한 바람과 얼음 같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서 바닷물과 내가 함께출렁거리며 파도를 타듯이, 화두 이외에는 어떠한 생각도 느낌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본래 부처’에 대해서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본래 부처인 내가 왜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해야 합니까?”

부처는 수행을 해도 부처고 하지 않아도 부처다. 그러므로 간화선에서는 굳이 수행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수행보다도 절박하고 사무치게 수행을 한다. 그 이유는 뭘까. 인간에게는 본래 부처라는 빛나는 보석을 숱한 먼지와 오물로 덮어온 세월이 있다. 그 먼지와 오물이 부처의 형상과 본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온갖 오물과 먼지에 파묻힌 물건을 두고 본래 부처의 빛나는 얼굴이라고 주장해봐야 자신만 허망할 뿐이다.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 마음속의 망상과 분별, 의도, 개념, 관념 따위의 먼지를 털어내어서 확인해야 한다.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니르바나를 향하여 새벽 걸음을 재촉하는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

나는 본래 부처이다! 굳은 신심으로 이미 구원되어 있는 나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간화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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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가 되려면 이 화두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화두를 조사관 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화두는 ‘문 없는 문’이다. 생각으로 접근하는 길을 철저히 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는 열릴 수밖에 없는 문이다. 화두는 이성적인 판단에서 내린 긍정과 부정의 길을 모두 차단한다고 해서 배촉관 (背觸關)이라고도 한다. ‘배’는 부정을 뜻하고 ‘촉’은 긍정을 뜻한다.옳다고 해도 벗어나고 그르다고 해도 벗어난다. 목탁을 목탁이라고 하면 그 목탁 에 걸려 목탁이라는 말에 매몰되고 목탁이 아니라고 해도 벗어나는 것 이다. 화두는 인간이 이름을 붙이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름이나 명칭 은 그것의 한 측면이거나 상징적 언어일 뿐이다. 입을 연즉 진실과는 등지 는 그야말로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다.

화두 수행에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 하나는 선지식이고 또 하나는 발심(發心)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화두를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고야 말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있지 않으면 화두는 수행자의 마음자리에 잡히지 않는다. 선지식은 바로 그러한 수행자에게 발심이라는 씨앗을 심어주고 강한 동기 부여의 역할을 한다. 화두를 들려면 발심이 있어
야 한다. 진정한 자기를 보고자 하는 마음이 천지간에 사무쳐야 한다. 발심이 얼마나 절박하느냐에 따라 화두에 대한 의심도 절박해진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당부하고 있다. 화두를 들 때는 홀어머니가 전쟁터에 보낸 외동아들을 생각하듯, 생사라는 두 글자를 눈썹에 붙여놓고 머리위에 타오르는 불을 끄듯 절박한 심정으로 화두를 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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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다란 의심은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의심 하나만 또렷하게 살아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의심하는 나’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철저히 죽어 없어지고 의심만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간절해야 어떤 자극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계에 부딪혀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간화선 수행을 하려면 자신이 부처라는 확고한 신심(信心)과 큰 의심 그리고 대분심(大憤心)을 내야 한다. 내 자신이 원래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중생놀음을 하고 있는 처지에 대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내는 것이 대분심이다. 이러한 분심이 분명해야 공부 중에 잡념이나 번뇌 망상이 올라오더라도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화두와 겨룰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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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질을 향하여 가차 없이 치고 들어가는 수행이다. “나는 누구인가”“이 뭐꼬”“무엇이 진리인가”등등의 화두에서 보듯이 돌아가거나 에둘러가지 않는다. 내 본질의 중심을 향하여 한 치 빈틈도 없이 창을 들이대는 것과 같다. 화두는 또한 아무런 맛이 없는 것 또한 특징이다. 생각이 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화두를 듦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거나 상쾌 해지거나 즐거워지지 않는다. 화두의 맛은 그야말로 몰자미(沒滋味)이다. 맛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런 맛이 없으니만치 화두를 들고 있는 동안 그 어떤 신비한 현상도 생길 수 없다. 화두를 순일하게 들고 있으면 그저 무덤덤한 상태가 계속될 뿐이다. 만약에 화두를 들고 있다가 부처상을 본다거나 미래의 어떤 일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등의 신비한 현상이 생기면 바로 망상인줄 알아차려서 내리고 다시 화두만을 지속적으로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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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善知識)은 간화선에서 발심과 더불어 두 가지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의 안내자이자 지도자인 선지식은 마음을 다스리고 깨우치게 하는 정신의 스승이다. 《화엄경》에서는 선지식의 역할에 대해 “사람들을 인도하여 일체지(一切智)로 가게하는 문이며 수레이며 배이며 횃불이며 길이며 다리”라고 언급한다.
 

선지식(善知識)은 간화선에서 발심과 더불어 두 가지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의 안내자이자 지도자인 선지식은 마음을 다스리고 깨우치게 하는 정신의 스승이다. 《화엄경》에서는 선지식의 역할에 대해 “사람들을 인도하여 일체지(一切智)로 가게하는 문이며 수레이며 배이며 횃불이며 길이며 다리”라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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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에서 선지식의 첫 번째 역할은 수행자의 발심 즉,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준다. 수행자의 수행 정도를 점검하는가 하면 최종적으로 깨달음을 인가하는 역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수행 지도자보다 그 임무가 막중하다.

선지식은 수행자의 진정한 발심과 공부를 위해 그의 모든 생각과 고정된 견해를 완전히 제거한다. 수행자의 올바른 수행을 위해 선지식이 쓰는 방편은 다양하고 괴팍하기까지 하다. 방망이로 때리고 느닷없이 고함을 치는가하면 사정없이 두들겨패서 내쫒는 스승도 있다. 이 모든 게 수행자가 올바른 수행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한 깊은 배려와 대자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러한 선지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선지식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 자리에서부터 어긋난다. 수행의 대상에 대하여 대의심을 내는 것 또한 간화선 수행의 큰 특징이다. 절박한 의심이 걸려있지 않은 화두를 사구(死句)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간화선에서는 의심을 의단(疑團),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는 말로도 쓴다. 수행자의 사무친 의심과 그 치열성을 엿볼 수 있는 비유이다. 이러한 표현은 화두가 익어가고 그것을 타파해가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처음부터 화두를 쉽게 들 수 있는 수행자는 극히 드물다. 화두가 수행자의 몸과 마음에 익어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보 수행자는 지속적으로 화두를 듦으로써 화두에 대한 마음의 근육을 강화해가야 한다. 화두를 드는 것이 몸과 마음에 익어가면서 차츰 의정(疑情)이 솟아나오게 된다. 의정이란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이 내 안에 이미 익숙해 있는 감정들처럼 자연스레 솟아나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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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또한 이와 같다. 문고리에 고리가 걸려있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화두가 수행자의 마음에 걸려 있는 상태. 이런 정도라면 화두는 수행자에게 더 이상 부담스런 그 무엇이 아니다. 자신의 호흡처럼, 앞산의 산 그림자처럼, 밥그릇 옆의 젓가락처럼 자연스러울 뿐이다. 이쯤 되면 수행자는 그저 화두를 자신의 중심에 두고 태산처럼 앉아서 정진할 수 있게 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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